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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 열림원

  • 인상 깊었던 문구

p52.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살마들 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善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살마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허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p114. 일이 많아진 아버지에게, 타고난 자존심만큼 경제력이 따라주지 않아 종종 울적해하고, 험난하게 펼쳐진 인생길 앞에서, 자식들의 호의나 배려 앞에서, ‘나도 다 아는 길인 혼자 가도 된다’며 화를 내는 어머니에게, 알겠으니 편히 가시라고, 대신 나도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 보겠노라고 약속드리고 싶다.
p115. 초初는 한자, 겨울은 우리말. 초는 처음이란 뜻. 그러나 ‘비로소’라는 의미도 있다. 겨울이란 말을 혀끝으로 만져본다. ‘기역’할 때 ‘ㄱ’과 혀 모양이 같아 그 원리에 새삼 조상들께 공손한 마음이 든다. 우리말의 질서를 입술과 혀, 턱과 성대, 그리고 마음으로 느껴본다. 겨울의 옛말은 겨슬(겼+를), ‘집에 있다’란 말뿌리를 가졌다. 그러니까 겨울은 ‘집에 있는’ 시간이다. 담요를 덮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 밤이 길어 아이들은 착해지고 이야기는 모자란 계절,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자꾸자꾸 바뀌고 보태지는 철. 그런 날들의 이름이다.
p124.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ㅁ낳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p142.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땐 시간이 든다. 하지만 그 시간은 흘러가거나 사라질 뿐 아니라 불어나기도 한다. 위에 김숙년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독서 중에는 시간끼리 접붙어 현재의 크기가 늘어나는 일이 적지 않다. 김연수 선배는 그렇게 생긴 공간의 너비를 나무 안듯 팔로 재어 그 ‘폭’을 우리에게 넘긴다. 문장 가까이서 볼 부비고 껴안는 대신 몸으로 잰 ‘품을 건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덕무의 시간과 최북의 시간이, 정약전의 시간과 김광석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그렇게 멀리 ㄸ러어져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p146.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 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 인생은 삶은 때때로 우리 앞에 어떤 얼굴로 나타나나? 시간은 자전거 앞자리에서 아빠를 돌아보며 웃는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앞에서 돌아보는 얼굴과 뒤에서 돌아보는 얼굴 둘 모두를 닮았다고 말이다. 
p180. 빨리 크느라 제대로 크지 못해,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개의 기관을 기워 붙인 듯 괴상한 얼굴을 갖게 된 한국에서, 오늘과 어제가 쉽게 작별하고, 내일을 오늘인 양 자꾸 우겨대는 이곳에서, 49년 반세기 가까운 시차를 둔 선생님의 근본과 이 시대의 근본은 어지 만나나.

p252.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살마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p253.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니라 나와 너로 만나는 그리하여 한 번 더 철저히 ‘개인’이 되는, 그 개인의 고유한 내면을 깊이 경험해보도록 돕는 문학의 언어를.
p269.‘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p298진짜 공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짐나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그리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좋은 일 중 하나는 타인의 얼굴에 표정과 온도를 입혀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