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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 문학동네

  • 인상 깊었던 문구

p10. 예정된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간은 약간의 고심을 할 수 있고 눈앞에 닥쳐온 진짜 문제를 잠시 망각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영역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아무리 자의로 주는 돈이라 해도 빼앗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리라.
p26.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잊이만, 우리들의 정신에 갖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그 토끼 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p49. 멀미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 오는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즉 자동차나 비행기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어지러움을 느낀다면 뇌는 이것을 비상한 상태, 즉 독버섯이나 독초를 먹었다고 판단하고 소화기관에 있는 음식물을 토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전자는 멀미를 겪지 않는다.
p57. 미국의 시나리오 작법 책들을 보면 작가는 인물의 성장과정, 가족 관계, 사고방식, 질병, 정치적 성향, 성적 취향, 친구 관계, 반려동물의 유무 등 온갖 요소들을, 비록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p58.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p64.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p64.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데이비드 실즈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p68.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대,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p78.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p86. 구글 아트 앤 컬처 앱이나 웹사이트로 들어가면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마치 실제 들어가서 둘러보는 것처럼 360도로 가상 체험할 수 있는 코너도 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코너도 있다.
p113. 탈여행은 믿을 만한 정보원을 시켜 여행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바야르는 에두아르 글리상이라는 작가를 예로 든다. 그는 노년에 이스터섬에 대한 책을 한 권 쓰기로 했으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자 아내인 실비 세마를 대신 보낸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가능케 하는 이 현명한 방법에는 분명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모든 물리적인 위험은 한 사람이 떠맡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장소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글을 통한 재구성이라는 본질적인 작업에 헌신할 수가 있다. 바야르에 의하면 그것은 ’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p147.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p157. 이렇듯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실뱅 테송의 표현대로 여행이 정말 일종의 습격이라면, 여행자들의 이런 선택은 원주민의 힘과 위계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p185. 남의 땅에서 우리의 힘은 약해진다. 약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들의 환대와 인정, 선물이 필요하다. 물론 자본주의는 이런 습격을 부드러운 거래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거래로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어서 누군가는 동굴로 돌아온 키클롭스의 마음으로 외부인을 적대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p193. 마치 꿈속에서 꾸는 꿈 같은 것인가? 아니면,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인가?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p197. 인간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대면한다. 어린아이들이 고아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