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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 와이즈베리

  • 인상 깊었던 문구

p15.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다.
p43.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1.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2.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 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but 공공선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
p51.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53.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 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p57.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p133.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했다. 개인 책임을 우선시하는 미국인의 강력한 성향과 불평등을 용인하려는 태도가 ‘열심히 일하면 사회적 상승이 쉽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노력이 갖는 힘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심은 불평등을 참아내기 힘들게 했으며, 그와 함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도록 했다.
p156. 스마트하냐 둔하냐는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 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윤리적 옳음보다 스마트한 게 백배 낫다는 인식을 심을 수 있다.
p160. 교육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노동계급과 비교해, 저학력자는 보다 자기 책임이 크고 더 비난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분노 감정이 많고, 호감이 적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런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p164.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p179.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 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p192. 시스템에 부정이 있다는 걸 알면 노동계급은 그것에 정치적으로 도전할 힘이 생긴다(그것이 노동당 수립의 밑천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계급 체제의 자의성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낮은 사회적 지위를 본인들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이다.

p.199.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p207. 자유사회에서 나의 소득과 부는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가치는 수요와 공급이 우연한 일치점에 따라 좌우된다. 나의 능력이나 미덕, 또는 내가 기여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p210. 롤스 ‘차등의 원칙’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시장 사회에서 거둔 성과를 능력이나 자격을 내세워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써 능력주의와 구별된다.

p222. 시장 수요에 부응한다는 건 단지 사람들이 우연히 갖게 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욕구 충족이 윤리적 중요성을 갖느냐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p283.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음 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p285.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p299. 시민권이 있다면 사회의 가장 보잘것없는 구성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는 지식과 교양을 접할 기회가 자유롭다. 모두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노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형태도 띤다. “미국의 기술자들은 무식한 일꾼들이 아니다. 개명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자기 손을 어떻게 쓸지 알 뿐 아니라 원리원칙을 어떻게 쓸지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p314. 계층 인지 감수성이 없다.

p320. 경제 문제에 대한 고려는 각자의 주머니에 얼마나 들어오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며, 각자가 경제 활동에서 갖는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느냐도 포함한다. 그들은 오랜 두려움, 즉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의 현실화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더 이상 별 쓸모가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p322.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 의미로만 풀이하는 방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눈을 감는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한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엄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다.

p326. 독일 사회이론가 액셀 호네트,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 MOTIVATION

p327. 헤겔과 뒤르켐. 일은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p333. 우리의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

p338.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로, 그리고 투기로 옮긴다는 뜻이다.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면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