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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의 과학공부 / 김상욱 / 동아시아

P13. 우주는 텅 비어 있다. 지구가 모래 알갱이만 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가 되고, 지구는 태양에서 6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오렌지 크기의 태양이 부산역 광장 분수대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은 부산역 플랫폼에 위치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p59. 영화 <터미네이터>가 그리는 암울한 미래는 과학기술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할 때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과학기술이 비관적 미래를 가져올까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보다 더 제대로 과학기술을 해야 한다. 
p69. 만약 당신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면 이미 뭔가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란 당신이 정의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이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게도 교육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다. 행복한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찾는 것은 부모, 교사, 사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아이 자신의 몫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p90. <그래비티>가 주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교훈이다. 중력이 버겁다고 느껴지면 뛰어내리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허공에 내맡기면 자유로워진다. 
p110.일본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에세이 [학문의 즐거움] 창조하는 인생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이다... 학문은 이러한 새로운 발견, 바로 창조를 위한 기나긴 과정이고, 이 과정을 통해 최고의 인생을 이룰 수 있으니 학문이 왜 즐겁지 않겠는가? 
p121. 위대한 과학자는 문지기를 무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이 절대 시간이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상대성이론에 도달할 수 있었고, 하이젠베르크가 운동 궤도라는 문지기를 무시했을 때 양자역학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뛰어난 과학자들은 문지기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문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만을 믿는다. 
p136.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이익이 상충할 때 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양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양보는 신뢰에서 온다. 결국 이 사회의 근본 문제는 정부에 대한, 대학에 대한, 회사에 대한, 거래처에 대한,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p157. 요즘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잘못된 사회에서 비판과 행동의 부재는 그 자체로 독재와 억압이라는 실체가 된다. 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이다. 
p225.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대처 방안을 찾는 것도 우선 인간을 정확히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역시 우리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문학이 더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P229. 문제는 인공지능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얻은 이익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이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대체할까 걱정하기보다 인공지능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지 않다. 더구나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을 믿는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이다.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을 바꿀 수 있을지라도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바꿀 수는 없다. 
인간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는 그 자체로 상상이기에 우리의 상상으로 지켜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비과학적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해질 거다.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p233.깨닫거나 안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큰 모순 없이 연결고리가 생겼을 때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p325. 예술가는 실패를 무릅씀으로써 또 다른 진화를 하기 때문이다. 과학도 그러하다. 나는 과학을 좋아하지만, ‘사실’을 알려주는 냉철함 때문이 아니라, 우선 ‘가설’을 세울 줄 아는 모험심 때문에 좋아한다.